1873년
일본의 가 을
1876년
한일 국교를 수립하여 일본이 한국에 진출
1895년
대한제국을 삼키려고 명성황후를 살해
1904년 2월 23일 : 를 체결
일본이 군사 전략적으로 필요한 지역은 일본이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하였고, 일본은 이를 빙자하여 남대문 시장, 용산, 한강변, 등 값비싼 땅은 다 차지하여 고급주택단지, 상가, 심지어 다방용지로 사용하였으며, 이 때부터 우리나라에 다방이 처음 생겨 났음
1904년 6월 6일 : 한국을 식민지화 할 목적으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
황무지 개간권이란?
대장성 관방장을 역임한 나가모리 개인을 내세워 한반도의 황무지 사용에 대한 허락을 요구하는 것이 황무지 개간권임. 즉 대한에서 명백히 사용하고 있거나 경작하고 있는 토지 외의 모든 땅을 개가, 정리, 척식하여 이익을 거두는 경영권을 나가모리에게 50년간 위임하고, 그 뒤 다시 50년간 사용권을 연장해달라는 그들의 요구와는 반대로 전국민의 조직적인 애국계몽 운동이라는 항일 민족운동이 일어났으며 고종황제는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거절하였음
● 개인을 내세운 이유 : 국제 여론에서 일제 당국이 무관하다고 주장하기 위한 잔꾀
● 만일 허락한다면 : 국토의 2/3 가 일제 손에 넘어가 실질적인 식민지화됨
● 결과 : 이 거절로 인하여 일본이 그들의 요구를 유보하는 대신 제 1차 한일 협약을 체결 하였음.
1904년 8월 22일 : 제 1차 한일협약 체결
● 일본이 추천하는 재무, 외교고문을 한국정부가 채용케 해서 급료는 한국에서 받고, 일은 일본을 위해서 하도록 하였음.
● 이때부터 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일본이 완전 장악하게 되었고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예속되었음.
● 이후 실권을 잡을 수 있는 협약을 계속 체결하여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음.
1904년 10월 9일 : 군사 시행령 시달
신문 잡지 광고 등 언론을 사전 검열하고 탄압하였음.
1904년 10월10일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제국신문에 대한 무기 정간 명령
1905년 5월 12일
영국주재 한국대리공사 이한응 선생이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비관하여 목을 메어 자살을 하였음
1905년 7월 29일 : 테프트 가쯔라 협약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데 필요한 특별한 권리 즉 보호권을 미국이 인정해 주는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 준다는 것이며 이 결과 을사조약이 체결됨.
1905년 11월 17일 : 을사조약
● 일본의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군대를 동우너 고종황제를 총칼로 위협하고 협박하여 강제로 체결하였음. 이때부터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대한을 실질적인 식민지화하고, 지배하는 기관이 되었음.
● 하세가와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훗일 일본의 총리가 되었음.
● 여기 배설선생의 묘역의 비문을 쓰신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선생의 시일야방성대곡 이란 제하의 논설을 호외로 발간하여 일제의 검열도 받지 않은 체 배포하여 황성신문은 정간되고 장지연선생은 일제관헌에 의해 감옥으로 갔음.
● 울분을 이기지 못해 민영환, 조병세, 홍만석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분사하였음.
● 배설선생은 제일먼저 을사조약체결을 가장 상세하게 보도하고 을사조약체결의 무효를 주장, 애국지사들의 분사사건을 보도하였으며 분사사건은 배설선생의 직필이 아니었다면 문서상 영원히 말살되었을 것임.
1906년 1월 18일
일본은 대한의 외부를 폐지하고 그 업무를 통감부에 이관하니 대한은 외교기능을 상실하였음.
1906년 1월 30일 : 고종황제의 밀서사건
※ 고종황제의 밀서(1906. 1. 30)
● 을사조약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이루어 졌으며 고종황제는 조약에 옥쇄를 찍지 않았다는 내용
● 고종황제는 영국 트리뷴(Tribune) 지의 특별통신원 더글라스 스토리(Douglas Story)에게 밀서의 원본을 주어 영국신문에 보도하게 하였음
● 고종황제는 이 사건 이후(1906. 6. 10) 배설 선생에게 특허장을 내렸음.
1906년 7월 6일 : 궁금령(宮禁令) 공포
● 이등박문이 고종황제에게 궁중의 위엄과 황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궁중을 통제할 필요성 주장, 이를 위해 궁중 출입원을 통제할 특별 병력이 궁중에 주둔해야 한다고 강요
● 황제는 동의 하지 않을 수 없었음.
※ 이등박문의 목적은 고종황제와 한국인뿐만 아니라 특히 외국인과의 접촉을 막으려는 목적이었음.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인하여 고종황제는 강제로 양위 당함.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한국병탄(한일합방)공포
1910년 8월 30일 : 일제 통감부가 대한매일신보사 탈취
● 대한매일신보는 제호를 매일신보로 바꾸어 통감부 기관지가 되었음.
● 대한매일신보는 창간이후 일제의 한국병탄 이전까지 민족의 울분을 대변해주고 [무억이 국권회복에 유익 하느냐?] 하는데만 초점을 맞춘 민족지였다.
● 광복이후는 공보처의 지시감독을 받았고 자유당 시절에는 자유당을 적극지지하는 독재정권의 대변자로 악명을 높이다가 4.19 역명때 데모군중이 사옥과 시설을 불태워 버려 정간하였습니다.
● 5.16 이후 다시 속간하여 1968년에는 선데이 서울이란 대한민국 최고의 대표적 도색잡지를 만들어 청소 년을 병들 게 하였습니다.서울신문 논설을 찾아 읽어보시면 양식있는 사람은 낯이 뜨거울 것입니다.
● 친일파의 변명은 총칼앞에 목숨을 구하려고 불가항력으로 변절하거나 일시 무릎을 꿇었다고 말하지만 배 설선생이 진정 위대한 점은
- 일생동안 정의의 편에 서서 투사로 살았고
- 어떤 박해와 탄압에도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투사로 남았으며
- 목숨을 잃을 때까지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선생이 유일한 유고 옥중기가 영국 브리스톨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어느 한 구절에도 항일투쟁을 후회하거나 대한사람들을 원망하는 문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