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떄 힘이 되었던 대한매일신보company_meaning.jpg

 

 

항일투쟁에 앞장선 민족정론지


오랜 쇄국의 빗장을 풀자 들이닥친 열강들.
그들의 각축으로 국가의 장래가 불투명하던 시기에 대한매일신보는 태어났습니다.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베델(한국이름 배설)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우국지사들이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데 앞장섰고 헤이그 밀사사건,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는 등 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습니다.

 

불굴의 자유언론 정신


일본의 방해와 회유에도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이미 발행부수가 1만부로, 당시에 발행되던 모든 신문
총발행부수의 두배를 넘었습니다. 일본 통감부는 이런 대한매일신보를 폐간시키기 위해 온갖 공작을 펼쳤
습니다.
일본은 결국 항일운동 선봉에 선 대한매일신보를 한일합병되던 1910년 8월 29일 종간시켰습 니다.
하지만 대한사람의 마음속에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정신과 이념은 결코 폐간되지 않은 채 오늘날 '서울신문'
로 재탄생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과 양기탁선생 


통신원에서 해임된 후 영어 통역관으로 소개받은 양기탁 선생을 통하여 박은식, 신채오, 선생 등과 자주 접촉하면서
① 한민족의 거국적인 민족운동에 감명을 받고
② 민족진영 인사들의 고매한 인격과 우국충정에 감명을 받고
③고종황제로부터 보조금이 나올 것이란 확신을 얻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래 친일적인 코웬은 정의의 편에서 정론을 펴는 배설선생과 신문 편집방향에 대한 의견충돌로 곧 한매일신보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양기탁 선생의 인물평


한국인 편집인인 양기탁 선생의 인격은 주한 영국 대사관 측은 물론이고 통감부조차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강직한 성품 때문에 존경과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주한 영국 총영사 Bonar는 양기탁 선생의 인격을 평가하기를
- 일본의 어떠한 회유에도 타협하지 않는 사람
-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는 사람
- 시류에 편승하는 인물은 더욱 아닌 사람이라고 평가 하였습니다.

양기탁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사가 일본 통감부의 공작으로 통감부의 앞잡이 이장훈에게 넘어간 그 날 (1910. 6. 14) 신보사를 떠났습니다.
- 1910. 5. 10. 만함이 이장훈에게 판매
- 1910. 6. 14. 발행인 이장훈에게 명의변경

 


편집방향


대한매일신보으 논설은창간호 사설에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요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 후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부터 일본의 부당한 침략정책과 한국인에 대한 만행을 낱낱이 들추어 보도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고 한구에 와 있는 일본 관리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이었습니다.
신문 편집뱡향은 [정의 편에 서서 불의와 싸워 전파함으로써 세계의 여론에 호소] 하는 것입니다.

 


주요보도내용


●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대한 비판
● 국채보상운동전개
● 일제의 침략 규탄
● 일본의 만행 보도
● 항일무장투쟁과 의병항쟁 취재보도 및 격려
● 한국군대의 강제해산부당성 성토
● 을사조역의 무효 주장
● 민 충정공 등 분사보도
● 헤이그 밀사 파견사건과 이준열사의 분사보도
● 고종황제의 양위 호외발간
● 명성황후시해 사건으로부터 일제만행 발굴 보도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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