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사순국


선생은 사해에서의 금고형, 끊임없는 일제의 위협과 박해, 영국정부의 압력, 신문사 간부들에 행한 구속조사, 이에 대한 분개심, 신문편집의 방해 및 자금난 등으로 건강을 크게 해쳐 1909년 5월 1일 36살의 젊은 나이로 분사 순국 하였습니다.
선생은 일생을 항일투쟁에 바친 민족의 벗이요, 은인이십니다. 선생은 화산처럼 뜨겁게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불태워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대한의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서거후 일제의 흉악한 만행으로부터 유해라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하여 일제의 손에서 벗어난 외국인 묘비에 안장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만사와 조문이 답지하여 두꺼운 만사책을 제책하였고, 추도문 추도서가 신문을 덮었으며,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의연금이 전국에서 답지하였습니다. 고종 황제께서는 관을 덮을 태극기를 하사하시고, 이 태극기와 대한매일신보에 게양하였던 영국기로 관을 덮었습니다.
근간에까지 많은 우리나라의 인사들이 일본을 왕래하며 골프장이나 술집은 빠지지 않았으나 이등박문을 사살하여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고 대한민국의 울분을 대변하신 윤봉길의사의 묘원이 있던 곳을 찾는 사람은 공식기록에 한사람도 없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영결식


5월5일 영도사에서 가진 추도식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추도사를 하였으며 양화진 장례식장에 이르는 연도에는 조문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신문은 전국에서 보내온 조문과 추도시로 전면을 덮었습니다.

 


일제가 선생의 비문을 깎다


선생의 타계를 슬퍼하던 뜻있는 분들이 선생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묘비를 세웠습니다.
비문은 황성신문 주필이셨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제하의 사설을 써서 통감부의 검열도 받지 않은 채 호외를 발간하여 배포하신 장지연 선생이 지으셨습니다.
선생이 하늘 나라에 가셔서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 되었습니다. 잔악한 일제는 한국병탄 후 선생의 비문을 깎아 없애 버렸다. 광복 후 20년이 지난뒤 한국편집인 협회의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일제가 깎아 버린 묘비엽에 원래의 비문 내용을 새겨 새 비를 새웠습니다.
1세기가 흘렀건만 일제는 지금도 그때의 침략야욕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전 국가가 수모를 당한 정신대 사건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고 딱 잡아떼고, 일본 정부의 검인정을 받은 역사교과서는 수백 군데를 왜곡하여 기록하고, 날조의 명수 일본학계와 언론계와 방송매체는 합작하여 고대유물을 몰래 묻어 놓고 발굴 작업을 벌여 일본의 고대역사를 기원전인 것처럼 날조하고, 심심하면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자위대의 무력증강을 억제해 온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어 또다시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한편 세계 도처에서 우경화 경향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어 주변정세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건국공로 훈장과 인물평


우리정부도 선생의 항일 언론 투쟁을 높이 평가하여 1968년 3월 1일에 대한 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습니다.
1988년 도서출판 [뿌리 깊은 나무]에서 [이 땅의 사람들] 이란 제목으로 한구그이 근대인물 88인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유일한 외국인이 배설이시다. 그책의 인물평에 [대한제국 말기에 어떤 한국 사람못지 않게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가 마침내 이 땅에서 돌아가신 언론인] 이라고 극찬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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